
이혼이라 함은 부부가 합의 또는 재판에 의하여 혼인관계를 해소하는 행위입니다. 즉 혼인관계를 계속해서 지속시킬 수 없을 때 부부의 합의에 의해 또는 재판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혼인관계를 끝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혼제도가 필리핀 법에는 없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나라는 우리 민법상에 협의상 이혼과 재판상 이혼을 규정하여, 당사자의 의사 또는 법원의 판결에 의해 혼인관계를 해소할 수 있는데, 필리핀 민법(Philippine Family Code)상에는 이러한 규정이 없으므로, 필리핀에서는 당사자가 더 이상 혼인관계를 유지하기 원하지 않는 경우에 혼인관계를 종료할 수 없습니다. 카톨릭 신도가 대부분인 필리핀에서 카톨릭 전통을 따른 결과라고 하는데, 이로 인해 현실적으로 이혼하고 싶어도 이혼하지 못한 채 법적으로 기혼자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서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혼제도가 없는 필리핀에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사람들이 제시하고 있는 것이 Annulment(어널먼트) 즉, 혼인무효(필리핀 법에서는 본래의 의미의 혼인무효-Declaration of Nulity of Marrage와 우리가 혼인무효라고 번역하는 어널먼트 -Annulment of Marrage는 구별하고 있으므로 혼동을 피하기위해 여기서는 어널먼트라고 부르겠습니다)라고 하는 제도입니다. 어널먼트의 효력(혼인 무효의 효력과 동일)은 말 그대로 무효 즉 혼인이라는 행위를 무료로 하여, 애초에 그런 행위가 없었던 상황으로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혼인무효 판결이 있게 되면, 양 당사자는 혼인을 아예 하지 않았던 신분 상태로 돌아가서 미혼자로서 다시 혼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재산관계에 있어서도 부부간의 재산은 공유로 간주(한국법은 추정)되는데 결혼 당시 결혼전에 가지고 있었던 재산의 처리에 대한 특별한 계약이 없었다면 그 재산 역시 공유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혼인관계가 무효가 되면 혼인이전의 재산에 대해서는 각 당사자의 재산이 되고, 혼인 이후에 취득한 재산에 대해서만 공유관계가 인정됩니다.
그러나 어널먼트는 당사자가 그것을 원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필리핀 가족법에 규정된 요건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필리핀 가족법은 제45조에서 어널먼트의 요건을 규정하고 있는데요, 어널먼트의 요건은 혼인당시에 다음과 같은 요건이 존재해야 어널먼트 소송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부모의 혼인에 대한 동의 결여(필리핀에서는 21세 미만의 사람이 혼인하는 경우 부모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두번째, 정신이상, 세번째, 사기, 네번째 강박(협박), 다섯번째 발기부전, 여섯번째 심각하고 치료가 불가능한 성병 등의 사유가 결혼 당시에 존재해야 하고, 또 어떤 경우가 사기에 해당하는가에 대해서는 제46조에서 결혼 당시 다른 남성에 의한 임신 사실을 숨기는 행위, 성병에 걸린 사실을 숨기는 행위, 약물 중독, 습관성 알코올 중독 또는 동성애 사실을 숨기는 행위, 도덕적 타락과 관련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실을 숨기는 행위 등을 규정하고 있고 대체적으로 이를 안 5년 이내(제47조)에 어널먼트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위에서 보듯이 필리핀 가족법 제45조에 규정된 요건에 의해서만 어널먼트 소송을 진행할 수 있는데, 과연 필리핀 여자와 결혼해서 살다가 어떤 사유로 인해 이혼을 해야 할 경우, 이혼제도가 없는 필리핀에서 어널먼트를 통해 혼인관계를 해소할 수 있을까요?
그동안 제가 만났던 변호사들의 유형을 보면, 첫번째, 가능성이 없으므로 돈 낭비 시간 낭비이니 시도하지 마라, 두번째,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들지만 해 볼만하다, 세번째, 자기가 맡으면 무조건 가능하다 걱정하지 말라 고 하는 변호사들이 있었습니다. 첫번째 유형의 변호사가 양심있는 변호사이고, 나머지 두 유형은 필리핀 법에 무지한 외국인을 이용해서 돈 벌이를 하려는 유형에 해당된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어널먼트는 가족법 제45조에 해당하지 않는 한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배우자가 간통(Adultery)를 한 경우에 그 유책 배우자를 상대로 어널먼트를 할 수 있을까요?
간통은 가족법 제45조 어널먼트의 요건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간통을 이유로 어널먼트 소송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간통은 형법상 범죄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형사적 절차에 따라 간통한 배우자를 고소하여 형사처벌을 받게 할 수 있고, 민법상으로 손해배상이나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간통을 한 배우자와 한 집에서 같이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강제로 배우자를 내쫓는 다는 것은 사적구제를 허용하지 않는 현대법(필리핀법도 마찬가지)상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다른 나라 같으면 이혼을 하면 그만이지만 이혼제도가 없는 필리핀에서는 필리핀 가족법에는 법적별거(제55조)Legal Separation)라는 제도가 있어서 이 제도를 통해 서로 따로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결혼관계는 해소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법적별거 판결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법적으로 결혼을 다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법적으로는 여전히 유부남, 유부녀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필리핀에서는 당사자의 의사에 의해 혹은 배우자의 간통 등에 의해 혼인을 지속할 수 없는 경우에도 합법적으로 혼인관계를 청산할 방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많은 필리핀 사람들이 법적인 해결 없이 그냥 서로 제 각각 자기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필리핀 남자와 결혼한 후에 서로 헤어져 살고 있는 필리핀 여자와 결혼을 하거나 같이 살고 싶은 한국 남자(필리핀 여자가 이미 남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면, 이 경우에는 법적으로는 필리핀 여자와 한국남자는 간통행위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한국 남자는 큰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제가 만났던 필리핀 변호사가 제시한 해결책은 부부 양 당사자가 변호사 입회 하에 앞으로 상호간의 성적, 경제적 등 모든 행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하는 각서를 쓰고 이를 공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 필리핀 여자와 법적으로 결혼은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동거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는 현실적인 해결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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